발해는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서 독자적인 정치 체제와 고도로 발달된 문화를 바탕으로 동북아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당나라와는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외교를 유지하며 고립되지 않는 국제 전략을 펼쳤다. 본문에서는 발해의 정치 구조와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 그리고 그 역사적 의미를 분석한다.
1. 고구려의 유산 위에 세워진 발해, 새로운 강국의 탄생
발해는 698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에 의해 동모산에서 건국된 국가로, 고구려 멸망 이후의 민족적 정체성을 이어간 계승 국가이다. 고구려의 패망 이후 당나라의 압박과 북방 유목 민족의 세력 확장 속에서도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을 통합해 새로운 국가 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발해의 성립은 단순한 지역 세력의 부활이 아닌, 동북아시아 정세 속에서 당당한 국제 정치 주체로서 등장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발해는 초기부터 ‘고구려 계승 국가’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관련 기록이 많지 않으나, 『구당서』, 『신당서』 등의 중국 사서에는 대조영이 스스로를 고구려 유민이라 칭하며 당에 복속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내용이 전한다. 발해는 국호 또한 ‘진’이라 하여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의 계보를 잇는 역사적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이후 713년경부터 국호를 ‘발해’로 사용하며 독립된 왕국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했다. 초기 발해는 당과의 관계에서 극심한 긴장을 겪었다. 당은 발해의 성립 자체를 고구려의 잔존 세력의 반란으로 보았으며, 이를 제압하고자 여러 차례 군사적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발해는 북방 말갈족과의 연합, 지형적 이점을 활용한 방어 전략을 통해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하였다. 특히 대조영은 직접 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발해의 독립적 정치 주체로서의 입지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무력 충돌 이후에도 당과의 외교 단절을 고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조영의 아들 대무예 시기부터는 당과의 외교를 본격화하며 국제 정세 속에서 고립되지 않는 전략을 펼쳤다. 이는 자주성과 실리를 동시에 추구한 외교적 유연성의 결과였다. 발해는 당과의 사절 교환, 문화 교류, 국제 통상 등의 방면에서 점차 정상적인 외교 관계를 구축해 나갔고, 이는 발해가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인정받는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하였다. 통일신라가 한반도 남부에서 문화와 불교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면, 발해는 북방 유목 문화와 고구려의 유산, 당 문화의 수용이라는 삼중적 성격을 지닌 복합 문명국가였다. 이 글에서는 발해의 정치 체제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그리고 당나라와의 갈등과 협력 속에서 어떻게 생존하고 성장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2. 발해의 정치 체제와 대외 전략의 조화
발해는 고구려의 정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적 환경에 맞는 정치 체계를 정립하였다. 그 핵심은 중앙 집권적 관료 체제의 확립이었다. 발해는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본받아 정비된 중앙 행정기구를 운영했으며, 이를 통해 왕권 중심의 강력한 통치 체제를 유지하였다. 발해의 3성은 중대성(국정 총괄), 정당성(행정 운영), 선조성(감찰 기능)으로 구성되었고, 6부는 각각의 행정 실무를 분담하며 정교한 국가 운영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행정 체계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었다. 발해는 당의 제도를 참조하면서도 자국의 현실과 고구려 전통을 반영하여 자체적으로 개량하였다. 예를 들어, 관직 명칭은 당나라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기능 면에서는 보다 독립적인 운용을 지향하였다. 또한 지방 통치 체계도 잘 발달되어 있어, 5경 15부 62주의 행정 구역 체계를 통해 방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였다. 이는 고구려 시대의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 질서를 정립한 사례로 평가된다. 발해는 단순히 중앙 정치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군사력과 외교력에서도 뛰어난 균형을 보여주었다. 특히 당과의 외교는 발해가 자주성을 유지하면서도 실리적 이익을 추구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당과의 초기 충돌 이후 발해는 727년부터 본격적인 사신 파견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수십 차례에 걸쳐 사절을 교환하였다. 당은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칭하며,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대우하였고, 이는 발해의 외교적 위상을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다. 발해는 중국 외에도 일본, 신라, 돌궐 등과도 다양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일본과는 문화와 물자의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신라와는 종종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실용적인 교류를 이어갔다. 또한 북방 유목 세력과의 외교와 무력 대응에서도 강인한 주체성을 보였으며, 말갈 지역과의 연대와 통합을 통해 내부 결속력을 강화하였다. 발해는 단순히 중국 문화에 종속된 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문명과 문화를 융합하여 독자적인 정치 전략을 구사한 국가였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발해는 당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고유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켰다. 이는 정치적 안정과 국제적 위상을 동시에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발해의 귀족 문화, 불교 사찰, 유물·유적은 모두 고구려의 전통 위에 새롭게 형성된 것이며, 당의 문화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자기화’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발해의 정치 체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구조, 효율적인 지방행정, 능동적인 외교 전략이 결합된 형태였다. 당나라와의 관계는 처음에는 긴장과 대립이었으나, 이후에는 평등한 외교 파트너로서의 입지를 확보하며 고대 동북아의 국제 질서 속에서 핵심 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3. 발해 외교의 유산과 현대적 의미
발해는 한국 고대사에서 상대적으로 조명이 덜된 국가이지만, 그 정치 체계와 외교 전략은 결코 고립된 지방 국가의 수준에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당대 동북아 국제 질서 속에서 주체적인 국가로서 활발하게 외교전을 펼쳤으며, 당나라라는 거대한 제국과도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발해가 당과 대립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유지하고, 이후 실리적 외교로 전환한 점은 오늘날 국제 관계 속 중견국의 전략적 태도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발해의 외교에서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대국과의 관계에서 자주성을 견지하면서도 실리적 협력을 도모한 점이다. 이는 대립과 협력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외교 전략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둘째, 단일 문명에 종속되지 않고 다문화적 융합을 통해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 점이다. 이는 오늘날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를 바라보는 데 있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발해는 단순히 고구려의 후계 국가가 아닌, 고구려의 유산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주체적인 문명국가였다. 당의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자국의 전통과 현실을 반영한 정치 체계를 정립하였고, 국제사회 속에서 문화 교류와 외교 관계를 능동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국제 사회에서 보여야 할 전략적 유연성과 주체성, 그리고 문화적 자존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발해의 외교는 오늘날 남북한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시사점을 제공한다. 고구려 계승이라는 동일한 뿌리를 가진 국가들이 각기 다른 체제와 문화로 발전한 이후, 어떻게 조화로운 공존과 협력을 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사유는 발해의 사례를 통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발해가 보여준 유연하고 자주적인 태도는, 현대의 외교·문화 전략 수립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결론적으로 발해는 고대 동북아의 ‘숨은 강국’이 아니라, 자주성과 전략적 사고를 바탕으로 국제 무대에 자신 있게 나섰던 역사적 주체였다. 우리는 발해의 정치와 외교를 단지 과거의 기록으로 소비할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교훈과 통찰로 되새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 속에서 우리는 보다 넓은 역사적 자부심과 문화적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