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부터 1905년까지 벌어진 러일전쟁은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패권 다툼이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군사 충돌을 넘어 조선의 외교적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전쟁의 배경과 경과, 그리고 한국의 외교적 고립 과정과 그 역사적 교훈을 살펴본다.
1. 두 열강의 충돌, 그리고 외교의 실종
20세기 초, 조선은 독립 국가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열강의 각축 속에서 외교 주권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었다. 특히 대한제국의 고종은 광무개혁을 통해 국가의 근대화를 시도하고, 열강 간의 균형 외교를 통해 자주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점점 더 거세게 조여오고 있었고, 그 중심에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한 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해나갔다. 그러나 러시아는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을 통해 일본의 랴오둥반도 점령을 저지하며 동북아에서의 주도권을 두고 일본과 갈등을 빚게 된다. 이후 러시아는 만주와 조선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한반도를 중시하기 시작했고, 이에 일본은 조선을 발판 삼아 대륙 진출을 꾀하며 러시아와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대한제국은 중립을 선언하며 열강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 미국 등과의 외교적 협상을 통해 자주 외교를 꾀했지만, 실질적 군사력과 국제 정치의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러한 시도는 무력하기만 했다. 조선은 열강의 경쟁장 속에 존재했지만, 그 주체는 될 수 없었다. 그리고 1904년 2월, 일본이 러시아의 극동 함대를 선제공격하며 전쟁이 시작된다. 이 글에서는 러일전쟁의 발발 배경과 전개 과정, 그리고 그 와중에 조선이 어떻게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는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나아가 이 전쟁이 대한제국의 운명에 어떤 전환점을 가져왔는지, 그리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외교적 교훈은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분석해본다.
2. 러일전쟁과 조선의 외교적 침묵
1904년 2월 8일, 일본은 아무런 선전포고 없이 러시아의 극동 함대를 공격하며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른바 **러일전쟁**의 개전이다. 전쟁은 일본과 러시아가 만주와 조선을 두고 벌인 제국주의적 패권 다툼이었고, 조선은 그 전략적 중심에 놓여 있었다. 일본은 조선 반도를 전쟁 수행의 군사적 기반으로 삼기 위해 조선 정부를 압박하였다. 전쟁 발발 직후,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해 ‘전쟁 협조’를 요구하며,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한다. 이 조약은 일본군이 조선의 영토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으로, 실질적으로 조선의 군사 주권을 일본에 내어준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외교적으로 중립을 지키고자 했지만, 일본은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이를 강제로 무력화시켰다. 이후에도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지속적으로 제한해나간다. 대표적인 것이 **제1차 한일협약(1904.8)**이다. 이 협약은 일본이 추천한 외국인 고문을 조선 정부의 각 부서에 배치하여 사실상 내정까지 장악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이 일본인으로 지정되면서 조선의 내정과 외교는 더 이상 자주적일 수 없게 되었고, 이로써 대한제국은 사실상 외교적 주권을 상실하게 된다. 러일전쟁은 조선 땅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일본군은 조선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키며 병참 기지와 군수 물자를 확보하였고, 철도, 도로, 통신망 등 인프라를 일본의 군사 목적으로 활용하였다. 민간인은 강제 동원되고, 식량과 자원은 수탈당했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러일전쟁은 자국의 땅에서 벌어진 타국 간의 전쟁이었고, 조선은 주체가 아닌 철저한 객체로 전락한 것이다. 전쟁은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미국의 중재로 체결된 이 조약에서 조선에 대한 언급은 단 한 줄도 없었으며, 일본은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러시아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 이는 조선의 외교권이 열강 간의 흥정 대상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후 조선은 곧바로 을사늑약(1905.11) 체결로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통감부 설치를 통해 일본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된다. 이는 국권 침탈의 실질적 시작이자,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결과였다. 대한제국은 독립국의 형식을 유지했지만, 그 실체는 이미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상태였다.
3. 조선 외교의 실패와 오늘날의 교훈
러일전쟁은 조선의 근대 외교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두 제국이 벌인 전쟁 속에서 조선은 단 한 번도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전쟁은 오히려 조선 외교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는 국제 사회의 도움을 기대했지만,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열강은 자신들의 이익 외에는 조선의 독립과 자주성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외교적 중립 선언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고, 열강은 중립을 존중하지 않았다. 고종은 미국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고,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는 등 여러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강대국 사이에서 힘을 갖지 못한 외교는 결국 아무런 실질적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는 국제 정치에서 ‘정의’나 ‘명분’이 아닌, 실력과 전략이 작동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오늘날에도 많은 교훈을 남긴다. 첫째, 외교는 철저히 실력과 국익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조선은 자주 외교를 시도했지만, 군사력과 동맹, 경제적 기반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외교적 고립만 가속화되었다. 둘째, 중립은 선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조선은 중립을 외쳤지만, 열강은 이를 무시했고, 중립의 실효성을 담보할 능력이 없었다. 셋째, 외교는 사전 준비와 장기 전략이 필수임을 보여준다. 조선은 갑작스러운 외교적 위기 속에서 우왕좌왕하였고, 내부적 혼란과 관료 사회의 부패가 더해져 일관된 외교 전략을 수립하지 못하였다. 이는 오늘날 외교 정책 수립에서도 시사점이 크다. 평화는 선언이 아니라 준비의 결과라는 말이 있다. 조선은 그 준비를 갖추지 못한 채 국제 정치의 한복판에 놓였고, 결국 운명을 외세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러일전쟁은 단지 일본의 승리, 러시아의 패배라는 결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외교적 고립과 국권 상실을 가속화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외교의 중요성과 동시에 그 한계를 분명히 드러낸 역사적 교훈이었으며, 우리는 그 실패에서 오늘의 외교 전략을 재정립할 지혜를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