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은 단순히 지역을 구분짓는 이름이 아닌, 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상징적 유산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오랜 역사를 거치며 자연스럽게 이어져 내려온 옛 지명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급격한 사회 변화와 행정구역 개편, 산업화, 도시화 등의 영향으로 많은 옛 지명이 사라지거나 변형되었고, 반면 일부 지명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사용되며 그 가치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사라진 옛 지명과 살아남은 옛 지명을 비교하고 그 의미를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1. 사라진 옛 지명 —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름들
우리나라의 지명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환경, 생활문화, 역사적 사건, 전설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된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러나 급격한 사회 변화, 행정구역 개편, 산업화 및 도시화 등의 영향으로 수많은 옛 지명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행정구역 통폐합, 신도시 개발 등으로 인해 전통 지명은 공식 지도와 행정문서에서 사라지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서울 강남 지역을 들 수 있습니다. 본래 강남 일대는 논과 밭이 넓게 펼쳐진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고, 언주면, 역삼리, 논현리, 도곡리 등의 자연 마을 이름이 존재했습니다. 이 지명들은 자연환경과 주민들의 생활 방식이 반영된 이름으로, 역삼리는 '역에서 삼 리 거리', 논현리는 '넓은 논의 고개 마을'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이들 지명은 대부분 사라지거나 동명 정도로만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서울 지역 내에는 수많은 자연 마을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용산구, 서초구 일대는 과거 서리풀, 우면, 양재, 방배 등 자연 마을 이름이 있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공식적으로는 구 단위 이름이나 대단위 아파트 단지명에 가려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생활공간의 이름은 존재했지만, 대도시화와 신도시 개발로 인해 원래 지명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있습니다.
경기도 성남시도 비슷한 사례입니다. 현재 분당구, 수정구, 중원구로 나뉜 성남시는 본래 광주군 언주면, 돌마면, 낙생면 등 농촌 지역의 자연 마을 이름이 존재했으나, 행정구역 통합과 신도시 개발로 인해 사라졌습니다. 이외에도 인천 송도, 경기 일산, 동탄, 김포 등 수도권 개발지 대부분은 과거 염전, 갈대밭, 논밭이 펼쳐진 자연 마을 이름이 사라지고 신도시 지명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보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 농촌 지역에서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해방 이후 군·면 단위 통폐합으로 많은 자연 마을 이름이 사라졌습니다. 전북 익산은 본래 이리시와 익산군이 분리되어 있다가 통합되며 많은 마을 이름이 사라졌고, 경상남도 진주 인근 지역도 과거 자연 마을 이름이 통합이나 변경으로 사라졌습니다.
사라진 옛 지명들은 대부분 지역 주민들의 구술 자료, 옛 지도, 향토사 기록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는 한국 현대화 과정에서 지역문화와 생활유산의 일부가 소실된 안타까운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는 옛 지명 복원 사업이나 지역문화 기록사업을 통해 그 가치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2. 살아남은 옛 지명 —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역사적 이름
반면, 우리나라에는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도 변함없이 사용되고 있는 살아남은 옛 지명이 많이 존재합니다. 이들 지명은 행정구역 개편이나 도시개발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가치, 지역 정체성, 문화적 상징성 등을 인정받아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자체가 지역 브랜드나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경주입니다.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는 서라벌(徐羅伐), 금성(金城) 등 다양한 옛 지명을 사용해왔지만, 경주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이후 지금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습니다. 경주는 불국사, 석굴암, 대릉원 등 수많은 문화재와 함께 옛 지명의 상징성을 보존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문화 도시로 자리 잡았습니다.
전라도 지역의 전주, 나주, 순천, 목포 등도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전통 지명으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주는 조선왕조 개국 설화와 연결되는 역사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으며, 나주는 '큰 들판의 고을'이라는 의미를 지닌 자연 친화적 지명입니다. 충청도의 청주, 충주, 공주 등도 역사적 유래가 깊은 지명으로, 지역문화 콘텐츠 개발에 적극 활용되고 있습니다.
서울 내에서도 살아남은 전통 지명이 존재합니다. 종로는 '종이 울리던 거리'라는 의미로 조선시대 보신각 종루가 있었던 거리에서 유래한 이름이며, 지금까지 서울 중심가의 핵심 거리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등 사대문 지역은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문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서울의 전통적 공간구조가 현대화 과정에서도 유지되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강원도 지역의 원주, 춘천, 강릉, 삼척, 동해 등도 자연환경과 지역문화에 기반한 옛 지명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원주는 '넓은 들판의 고을', 춘천은 '봄이 오는 내', 강릉은 '큰 강의 언덕'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이들 지명은 지역 정체성 강화와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옛 지명들은 지역 주민들의 강한 애착과 문화유산 보호 노력 덕분에 유지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각 지자체는 전통 지명을 활용한 지역 브랜드 개발, 관광상품 제작, 문화행사 개최 등을 통해 경제적 가치 창출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옛 지명을 잘 보존하고 활용하는 것은 지역문화 발전과 역사적 정체성 유지에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3. 사라진 지명과 살아남은 지명의 가치와 보존 방안
사라진 옛 지명과 살아남은 옛 지명은 각각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보존과 활용 방법에는 차이가 필요합니다. 사라진 지명의 경우, 복원이나 재해석 작업이 필수적입니다. 지역 구술사 채록, 고지도 복원, 지명 유래 기록사업 등을 통해 옛 지명을 발굴하고, 도로명, 공원명, 역사문화 시설명 등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살아남은 옛 지명은 지역 정체성 강화를 위한 자산으로 적극 활용되어야 합니다. 문화재 보호구역 설정, 지역 브랜드 마케팅, 관광 자원 개발, 교육 프로그램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옛 지명의 가치를 알리고 전승해야 합니다.
행정기관과 지자체는 향토사 연구자, 지역 주민, 전문가와 협력하여 지명 보존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행정구역 개편이나 도시 개발 과정에서 무분별한 지명 변경을 방지하고, 전통 지명의 문화적 가치를 적극 반영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요구됩니다.
결국 지명은 단순한 공간 정보가 아닌, 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체입니다. 사라진 지명은 복원과 기록을 통해 그 가치를 살리고, 살아남은 지명은 더욱 발전시켜 지역사회의 정체성과 문화유산 보호에 기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