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고종의 반발, 이완용 등의 매국 행위, 그리고 민중의 저항까지, 을사늑약의 전말과 그 역사적 의미를 분석한다.
1. 국권이 무너진 날, 조선의 외교는 침묵했다
1905년 11월 17일, 한민족의 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 날,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조약인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당함으로써, 명목상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인 주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늑약’이란 말 그대로 ‘강제로 맺은 조약’이며, 국제법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불법적인 조약이었다. 그러나 그 조약은 결국 한국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첫 번째 단추가 되었으며, 근대 외교의 실패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았다. 을사늑약은 단지 한 조약의 체결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자존이 꺾인 순간이었고, 동시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였다. 이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수 없게 되었으며, 모든 외교 사무는 일본의 통감부가 대행하게 되었다. 조선은 독립국의 외피만 남긴 채, 외교라는 주권의 핵심을 상실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조약이 체결된 장소는 덕수궁 중명전. 고종은 이를 반대했지만,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일본군은 무력으로 궁궐을 포위하고, 당시 내각을 협박해 조약 서명을 강요했다. 이른바 ‘을사오적’으로 불리는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이근택 등이 조약 문서에 서명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공식적으로 일본에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고종 황제의 재가 없이 체결되었으며, 이는 당시 헌법적 절차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고종은 뒤늦게 세계 각국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시도하였고, 이는 국제 여론을 환기시키는 한편, 조선 내부에서는 대규모 의병 항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본문에서는 을사늑약 체결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이에 따른 주권 박탈과 저항의 양상,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되새겨야 할 교훈을 상세히 고찰하고자 한다.
2. 조약인가 강탈인가, 을사늑약 체결의 전말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한다.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곧바로 대한제국을 외교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11월, 일본은 하야시 공사를 통해 내각에 ‘외교권 위임’을 요구하며, 이를 관철하기 위한 물리적 압력을 가한다. 당시 고종은 이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황제로서 외교권은 절대 양도할 수 없는 국가의 핵심 주권이라 판단했고, 거듭 조약 체결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덕수궁을 포위하고 일본군을 배치한 상황이었으며, 조선 정부는 사실상 무력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 내각을 상대로 개별 협상을 시도했고, 끝내 일부 대신들이 서명하게 된다. 바로 그들이 을사오적으로 기록된 이완용(내각총리대신), 박제순(외부대신), 이지용(탁지부대신), 권중현(법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이다. 이들은 일본의 압박과 회유에 굴복하거나 자발적으로 협조하여, 고종의 재가 없이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조약에 서명하였다. 고종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며 재가하지 않았고, 일본도 조약에 황제의 옥새 없이 국새만 날조하여 조인을 완료하였다. 을사늑약은 국내 법적으로도, 국제 법적으로도 불완전한 조약이었다. 당시 대한제국 헌법상 황제의 재가 없이 체결된 조약은 무효였고,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본은 외교적 관례를 위반한 물리적 협박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한 채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하여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본격화한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하고, 국정 전반에 걸쳐 일본의 간섭을 받는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을사늑약에 대한 반발은 거셌다. 고종은 이듬해인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비밀리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려 하였고, 이는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본의 압력으로 무산되었고, 오히려 고종은 강제 퇴위당하게 된다. 또한 을사늑약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 항쟁이 격화되었으며, 민중은 무기를 들고 일어나 외세와 매국노에 맞섰다. 이와 같은 항쟁과 저항은 단순한 무력 저항을 넘어, 자주권과 민족정체성 수호를 위한 운동이었다. 조약에 서명한 을사오적은 이후 민족 반역자로 낙인찍혀 전국적으로 암살 대상이 되었고, 1910년 한일병합으로 이어지는 과정 내내 을사늑약은 불법적 기초로 인식되며,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핵심 논거가 된다.
3. 을사늑약이 남긴 상처, 되찾아야 할 주권의 의미
을사늑약은 단지 한 조약이 아니라, **한 나라가 외세에 의해 외교권을 박탈당한 비극의 상징**이다. 그날 이후 조선은 외교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국제 무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이는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잃는 것이자, 자주성을 빼앗긴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조약은 국민의 동의도, 황제의 재가도 없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점에서, 외교적 강탈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을사늑약을 통해 우리는 외교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외교란 단순한 국가 간 조약 체결이 아닌, 국가의 의지를 대외적으로 실현하는 자주권의 표현이다. 조선이 그 자주권을 잃었을 때, 국민은 무력했고 정부는 분열되어 있었으며, 외교는 이미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는 곧 국가 시스템이 붕괴했음을 의미하며, 그 결과는 식민지라는 참담한 현실이었다. 을사늑약을 막지 못한 데에는 당시 국제 정세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이미 일본과 각각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을 체결하며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패전국으로 물러나 있었다. 즉 조선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채,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민중과 지식인, 군인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의병으로, 독립운동가로, 그리고 문화인과 외교인으로서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하였다. 을사늑약은 그들의 싸움이 시작되는 출발점이자,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근거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외교의 중요성을 다시 되새겨야 한다. 주권은 외세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국가가 스스로 지켜내야 할 가치이며, 외교는 그 주권을 지키는 가장 정교한 도구이다. 을사늑약이 남긴 상처는 깊지만, 그 상처는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교훈이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을사늑약은 외교의 실패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경고였다. 그리고 그 역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