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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다시 일으키려 한 사나이,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그 한계

by 동글나라 2025. 4. 27.

흥성대원군 개혁과 한계

조선 말기, 왕권과 국가 기능이 마비된 상황에서 흥선대원군은 실권을 장악하고 강력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대대적인 세도 정치 청산,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통상 수교 거부 등 그의 개혁은 조선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였으나, 동시에 고립과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1. 혼돈 속에 등장한 실세, 흥선대원군의 권력 장악

19세기 중엽, 조선은 극심한 내외부 혼란 속에 있었다.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국정은 마비되고, 사회는 부패와 불신으로 가득했으며, 외세는 점점 더 강하게 조선을 압박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이는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었지만, 그는 나이가 너무 어려 실질적인 정치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이때 섭정으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그는 오랜 무관 출신으로, 기존 정치 세력과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정치 개혁의 적임자로 여겨졌다. 흥선대원군은 정권을 잡자마자 조선의 전통적인 권력 구조에 메스를 들이댔다. 그의 핵심 과제는 무너진 왕권의 회복과 세도 가문의 축출, 국정 정상화였다. 그는 이를 위해 비상한 정치력과 과감한 결단력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특히 국왕 중심의 통치체제를 회복하려는 그의 노력은 철종 이후 형식적 존재로 전락했던 왕권을 다시금 정치의 중심에 세우는 시도였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인사 개혁이었다.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세습되던 고위 관직을 대폭 정비하고, 매관매직으로 얼룩진 관료 체계를 바로잡았다. 이는 기득권 세력의 거센 반발을 초래했으나, 대원군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단호한 태도로 개혁을 밀어붙였다. 동시에 그는 법과 제도의 정비를 통해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내부의 적폐를 청산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외부의 위협에 대한 강경 대응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통해 서구 열강과의 관계를 차단하였으며, 이를 통해 외세의 내정 간섭을 차단하려 했다. 또한 서양 선교사 및 외국 선박의 접근을 봉쇄하며, 조선의 전통적 자주성을 수호하고자 했다. 이처럼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혼란한 조선을 재정비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정책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엔 한계가 있었고, 일부는 오히려 새로운 갈등과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본문에서는 그의 개혁 정책이 어떻게 전개되었고, 그 결과는 무엇이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지를 다층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2. 개혁과 고립의 양날검, 흥선대원군의 정책 분석

흥선대원군의 대표적인 개혁 중 하나는 바로 **서원 철폐**였다. 서원은 본래 교육과 향촌 자치의 중심이었으나, 세도 정치기에 이르러 지방의 사적 이익과 결탁하며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그는 전국 수백 개 서원 중 47개만을 남기고 대대적으로 철폐하여, 불필요한 재정 낭비를 줄이고 중앙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는 양반층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지만, 민생 안정과 재정 개혁이라는 차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두 번째로 중요한 조치는 경복궁 중건이다. 흥선대원군은 상징적으로 무너진 왕권을 시각적으로 복원하기 위해 경복궁 재건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해 원납전이라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였고, 상민과 상인들까지 강제로 기부에 동원되었다. 이 과정은 정치적으로는 상징성을 가졌지만, 현실적으로는 민심 이반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백성들의 불만은 이후 민란과 저항 운동의 단초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외교 정책은 철저한 쇄국 정책이었다. 그는 서양 열강의 개입과 선교사를 철저히 배척하며,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외세와의 접촉을 거부하였다. 이는 당시 세계 정세에 비추어볼 때 시대착오적이라는 평가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당시 조선이 외세의 침략에 얼마나 민감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정책이었다. 이러한 고립주의는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의 외세 침입을 초래했으며, 이후 일본과의 대립에서도 준비 부족이라는 치명적 한계를 드러냈다. 그의 군제 개편도 주목할 만하다. 기존의 무력한 군대를 대체할 목적에서 상비군 중심의 체제를 구상하였으나, 예산과 인력의 문제로 제대로 정비되지 못하였다. 이는 훗날 강화도조약 체결과 외세의 무력 개입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행정 개혁, 왕권 강화를 위한 상소 통제, 지방관의 교체 등을 통해 전반적인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려 했으나, 이 역시 기득권의 저항과 재정 부족으로 성과가 제한되었다. 흥선대원군은 통치 전반에 걸쳐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였지만, 그의 정책은 대부분 상명하복식이었다. 신하들과의 협치를 중시하지 않고, 비판 세력은 억누르며 반발을 일으키는 일이 많았다. 특히 천주교 박해 정책은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어 병인양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외교적 고립은 곧 국력 약화로 이어졌다. 결국 이러한 내부 개혁과 외교 정책은 단기적 효과를 거두었지만, 장기적 안정에는 실패하였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와 ‘변화를 거부한’ 고집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였다. 그는 시대의 흐름에 맞서는 방식으로 조선을 지키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고립을 자초하며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역할도 하게 되었다.

 

3. 개혁자였는가, 고립주의자였는가? 흥선대원군의 유산

흥선대원군의 집권기는 조선 후기 정치의 마지막 정비 시도였으며, 동시에 근대화 기회를 놓친 결정적 시기로 평가된다. 그는 강력한 리더십과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고, 무너진 국가 체제를 재건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개혁자였다. 서원 철폐, 부패 척결, 왕권 회복, 군제 개편 등의 조치는 당시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개혁이었으며, 조선을 다시 세우고자 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개혁의 방향과 방법에서 시대의 흐름을 간과했다. 외세와의 접촉이 불가피했던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철저한 쇄국 정책은 조선을 국제 질서에서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같은 무력 충돌은 조선이 국방과 외교 양면에서 무방비 상태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의 개혁은 강력했지만, 협치와 포용, 그리고 변화에 대한 유연성은 부족했다. 흥선대원군의 가장 큰 한계는 ‘미래를 위한 개혁’보다는 ‘과거를 회복하는 개혁’에 집중했다는 점이다. 그는 조선의 전통 질서를 복원하는 데에 주력하였고, 근대화, 기술 발전, 외교 다변화 등의 시급한 과제를 놓쳤다. 이로 인해 그의 개혁은 일시적 효과에 그쳤으며, 이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대부분 폐기되거나 후퇴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산은 단순한 실패로만 볼 수 없다. 그는 부패와 무능으로 얼룩진 조선을 바로잡으려 했으며, 왕권 중심의 국가 체제를 복원하고자 한 점에서 명확한 의지를 가진 통치자였다. 그의 정치 철학과 방식은 당대 조선이 가진 구조적 한계와 마주한 생존 전략이었고,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의 현실을 반영한 결정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흥선대원군을 ‘개혁의 상징’으로도, ‘고립의 상징’으로도 기억한다. 중요한 것은 그의 정치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이다. 변화의 시기에 필요한 것은 힘만이 아니라 방향이고, 결단만이 아니라 공감이며, 고집이 아니라 통찰이라는 교훈을 흥선대원군은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조선을 지키려 했으나 시대를 놓쳤고, 개혁을 시도했으나 협력을 잃었다. 그 역사는 오늘날 변화와 개혁을 고민하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메시지를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