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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끌려난 날,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의 종말

by 동글나라 2025. 4. 28.

고종 강제 퇴위

1907년,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 삼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킴으로써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완전히 박탈하였다. 이 글에서는 고종 퇴위의 배경과 과정, 그로 인해 드러난 일본의 침탈 구조와 대한제국의 붕괴를 조명한다.

1. 황제가 사라진 제국, 자주권의 붕괴

1907년 7월 20일, 조선 왕조 500년을 이은 군주,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더 이상 나라의 중심에 머무를 수 없었다. 그 날,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아들 순종을 즉위시킴으로써 대한제국을 실질적으로 마무리 짓는 한 수를 두었다. 이는 명백한 **외세의 내정 간섭이며, 국가 원수에 대한 강제적 퇴진 조치**로, 조선 역사상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배경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이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고, 이는 일본의 대외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일본은 이를 구실 삼아 고종이 ‘국제 외교를 자의적으로 수행했다’고 비난하였고, 그 결과로 퇴위를 강요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실제로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후,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 내부 정치를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여전히 대한제국 황제로서 존재하며 민족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다. 일본에게 고종은 제거해야 할 정치적 장애물이었고, 순종이라는 유약한 후계자를 내세워 완전한 식민 통치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만들고자 하였다. 당시 고종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덕수궁은 일본군에 의해 철저히 감시받고 있었고, 황실 내부마저 일본의 영향력이 침투해 있었다. 조정 대신들 중 상당수는 친일파로, 일본의 계획을 묵인하거나 협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명목상 존속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완전한 통제 아래 놓인 국가가 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제국의 ‘몰락’을 상징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본문에서는 고종 강제 퇴위의 구체적 경과와 배경, 일본의 식민 통치 전략 속에서 이 조치가 갖는 의미, 그리고 고종 퇴위 이후 대한제국의 껍데기만 남은 현실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2. 고종 퇴위의 과정과 그 이면의 강제성

고종의 퇴위는 단순한 내치의 변화가 아닌, 일본의 **조선 병합 전략**의 일환이었다.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일본은 대한제국 황제의 외교 시도가 자신들의 통감정책에 반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즉각적인 대응을 준비했고, 고종의 퇴위는 조선 내의 **친일 내각과 일본 외교당국의 합작**으로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의 정치 상황은 이미 일본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통감부가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고, 군대 해산 등 조선의 자주권은 거의 무력화된 상태였다. 고종은 이를 막기 위해 다시 한번 외교적 수를 꾀했으나, 국제사회는 조선의 입장을 묵살하였다. 열강은 이미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하는 분위기였고, 조선 황제의 목소리는 더 이상 힘을 얻지 못했다. 7월 18일, 일본은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궁궐은 일본 헌병대가 장악했다. 7월 20일, 고종은 무력과 압박 속에 퇴위 성조문을 작성하게 된다. 이 성조문은 자의적 퇴위가 아니라 일본이 강제로 받아낸 문서였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불법적인 정권 전복 행위로 평가된다. 그의 뒤를 이은 순종은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황제였다. 순종은 즉위하자마자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이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내정권마저 일본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관제 개편, 군대 해산, 재정 장악 등은 순식간에 이뤄졌으며, 대한제국은 껍데기만 남은 나라로 전락한다. 한편 고종의 퇴위는 민족적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민중은 황제를 퇴위시킨 일본의 만행에 크게 분노하였고, 해산된 군대 출신 인사들은 정미의병으로 재편되어 전국적인 항일 무장투쟁에 나서게 된다. 고종은 비록 권력을 잃었지만, 그 존재 자체가 항일 정신의 상징으로 남게 된다. 이처럼 고종의 강제 퇴위는 일본이 조선의 자주권을 완전히 장악한 사건이며, 동시에 대한제국의 실질적 멸망을 알리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3. 왕좌에서 밀려난 황제, 고종 퇴위가 남긴 것들

고종의 강제 퇴위는 단순한 권력 이양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한제국의 자주권이 완전히 붕괴된 순간**, 그리고 조선 왕조의 역사적 사명이 실질적으로 종료된 시점이었다. 그는 끝까지 자주 외교를 시도하였고, 국제회의에 특사를 보내며, 열강의 양심에 호소하려 했지만, 힘없는 외교는 식민지의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 고종은 개인적으로는 무기력한 군주였다는 평가도 받지만, 외세에 맞서 조선을 지키기 위한 여러 시도들은 분명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특히 헤이그 특사 파견, 근대 개혁 정책 추진, 대한제국의 황제 즉위 등은 모두 국권 회복을 위한 고종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체계적 침탈과 국내의 협력 세력, 그리고 국제 정세의 냉혹함은 고종의 뜻을 끝내 실현하지 못하게 했다. 순종이 즉위한 후 대한제국은 빠르게 일본의 식민지로 편입되어갔다. 군대는 해산되고, 국권은 축소되었으며, 통감부는 내정 전반을 장악하였다. 결국 3년 후인 1910년, 조선은 공식적으로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이 모든 흐름은 고종 퇴위라는 전환점을 지나면서 가속화된 것이며, 따라서 고종의 퇴위는 조선 독립의 상징이 무너진 순간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동시에 고종은 그 존재만으로도 민족 저항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의 퇴위에 분노한 민중은 다시 무기를 들었고, 의병은 전국에서 봉기하였다. 고종은 퇴위 후에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했으며, 독살설까지 나올 정도로 일본에겐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는 권력을 잃었지만, 정신적 황제로 남아 한민족의 항일 정서를 결집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오늘날 고종의 퇴위는 ‘망국의 길’이 아니라 ‘저항의 출발점’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외세에 의해 강제로 권좌에서 밀려난 한 나라의 황제가, 그 침묵 뒤에 어떤 신념과 투지를 간직하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무력한 퇴장이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사의 첫 장이었다. 결론적으로 고종의 퇴위는 대한제국의 몰락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한민족의 새로운 저항과 자각의 출발점이었다. 그날 황제가 떠났지만, 그 정신은 남아 항일의 불꽃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광복의 역사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